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도룡뇽알을 주우러 갔던 다섯 아이가 인근 야산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당시 20만명이 넘는 경찰병력이 수색하는 데에 동원됐지만 아이들을 찾지 못했다.
아이들은 11년이 지나서야 유골로 발견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을 '개구리소년 사건'이라 부른다.
올해는 개구리소년 사건 30주기. 아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여기, 지난 20년간 개구리소년의 넋을 기리며 추모제를 지내온 사람이 있다.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모임’ 회장은 매년 2~3월이 가장 바쁘다. 3월26일 개구리소년 추모제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번 추모제 하루 전날 먼저 대구로 내려가 현장을 살핀다. 20여년 동안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해온 일이다.
나 회장은 올해로 66세. 그중 무려 30년을 개구리소년 사건을 쫓는 데 쏟았다. 1991년 7월 인천 월미도에서 아이들을 찾던 개구리소년 유가족과 처음 만나 현재까지 연을 이어왔다. 개구리소년 사건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 회장은 유가족 곁을 지켰다.
강원도 홍천 산골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모친은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떴고, 아버지가 일을 나간 사이 동생들을 돌보느라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15세 때 강원도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17세 때 이모의 소개로 인천의 중국집에서 일하다 서울로 오게 됐다.
잘 먹지도 못하고 몸을 혹사하던 중 덜컥 폐결핵에 걸렸다. 기침을 하다 피를 쏟아냈다.
“몸은 아프고 일도 못하고, 삶의 의미가 없었어요. 사이나(청산가리)를 손에 꼭 쥐고 시커먼 강물만 보고 있었죠. 그런데 그 시커먼 강물 여울 속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이더라고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우리 엄마. 그 자리에서 바닥에 얼굴을 묻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3년을 꼬박 앓고 나서야 완치가 된 그는 서울 청량리에 자리 잡았다. 그때가 1980년 5월,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노점으로 생계를 이어가려 했지만 단속이 심해지면서 연이은 실패를 맛봤다. 결국 각설이 분장을 하고 춤추면서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일에 뛰어들었다. 1991년 7월, 그가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 때라고 말한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인천 월미도에 갔던 날이었습니다. 저쪽에서 ‘우리 아이들을 찾아주세요’ 이런 소리가 들리고 40대 정도 된 남자들이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어요. 그때는 온 바닥에 껌이 그렇게 많았는데, 어떤 여자가 그 전단지로 자기 하이힐에 붙은 껌을 떼는 거예요. 아니, 그걸 보는데 마음이 좀 이상했어요.”
1991년 3월26일 개구리소년 사건이 일어나고 아버지들은 트럭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니던 중이었다. 그는 아버지들에게 다가가 전단지를 나눠주겠다며 한 묶음을 받아왔다. 이것이 바로 개구리소년 아버지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개구리소년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아버지들과 전단지를 나눠주는 각설이에게로 취재 요청이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이후 나 회장과 아버지들은 청량리역에서 다시 만났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연락처를 주고받고 상황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는 아예 대구로 내려가 아버지들과 동행했다.
3년6개월 동안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나 회장과 아버지들은 남은 가족들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트럭은 폐차를 해야 할 정도로 낡은 상태였다. 나 회장도 서울 청량리로 돌아와 다시 노점을 차렸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라면 노점 리어카에 실종아동의 전단지가 항상 비치돼있었다는 점.
나 회장이 지금까지 전국의 고아원, 기도원 등을 뒤져 찾아낸 실종아동은 수백여명에 이른다. 나 회장이 실종아동을 찾아준다는 소문이 나면서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가 걸려왔다.
2001년 서울시민대상과 함께 받은 상금 300만원으로 지금의 전미찾모 사무실을 만들었다. 나 회장의 컨테이너는 20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실종아동 부모들, 실종아동 문제를 개선하겠다던 정치인들, 경찰, 동네 주민 등이 전미찾모를 드나들었다.
"의문 투성이에요. 이상한 사건입니다."
정신없이 바쁜 나날 중에도 나 회장은 개구리소년 사건을 잊지 못했다. 사건과 관련된 정보를 유가족 이상으로 훤히 꿰고 있지만 끝내 명확한 답을 찾지 못한 상태다. 30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같은 상황을 보고 들은 나 회장과 유가족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
그래서 나 회장은 개구리소년 사건을 놓을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큰 사건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사회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개구리소년 추모비 건립을 추진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나 회장은 지난달 27일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대구 와룡산 세방골과 추모비 건립 예정 장소를 찾아 묵념하고 소주를 뿌렸다. 2001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김철규(김종식군 아버지)씨도 추모했다. 김씨는 아들의 유골을 보지 못했다.
“철원아, 호연아, 영규야, 찬인아, 종식아. 너희들의 이름을 알리고 범행의 실체가 밝혀지는 그날까지 너희들 아버지와 아저씨가 열심히 할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도와주거라. 그리고 종식이 아버지, 우리 지켜봐 주시고 당신 몫까지 우리가 힘을 합쳐서 범인을 꼭 잡아서 처벌하는 그런 시간이 되도록 만들어 주세요.”
나 회장은 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개구리소년 사건을 쫓겠다고 다짐하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혹시라도 범인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우리 아이들을 왜 죽여야 했는지, 그 이유라도 알려 주십시오.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겠습니다. 꼭 좀 알려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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